혼자 아픈 밤을 보내본 사람은 압니다. 열이 39도까지 오르는데 약상자는 비어 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배달 앱으로 죽 한 그릇 시키는 것조차 버겁던 그 순간의 서러움을요. 땀에 젖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누워있는데, 문득 "지금 여기서 내가 쓰러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아픈 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물 한 컵 떠다 줄 사람 없는 이 공간의 완벽한 정적이었습니다.

병원 침대 위에서 시작된 기록의 힘
20살, 자취방에 막 들어간 그날 밤부터 복부 출혈로 두 달간 병원 신세를 진 경험이 있습니다. 혈소판 부족으로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의사 선생님들이 모여 "이걸 어떡하냐" 상의하던 그 순간의 두려움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배우를 꿈꾸던 스무 살이었는데, 갑자기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 놓이니 "앞으로 연기를 못 하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병원비 걱정에 마음이 썩어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책 한 권과 노트, 볼펜 한 자루를 주고 가셨는데, 저는 책 대신 노트에 낙서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눈이나 할머니들 얼굴을 그리다가, 점점 제 상황과 감정을 막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이런 존재이고 왜 하필 내가 아픈 것이며" 같은 원망을 종이 다섯 장에 빼곡히 적어 내려갔습니다. 다 쓰고 나서 딱 놓으니까, 제 감정을 어딘가에 풀어내는 작업을 처음 해본 거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발견한 것이 바로 감정 라벨링(Emotional Labeling)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감정 라벨링이란 불안이나 분노 같은 막연한 감정에 구체적인 이름표를 붙여 객관화하는 심리 기법으로, 심리학에서 검증된 스트레스 완화 방법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글로 적어내니까 통제 불가능한 괴물처럼 느껴지던 감정이 분석하고 수정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적어 놨던 글에 문제점이 있으면 찍 그어 버리고, 그 밑에 해결책을 써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굉장히 애 같음. 너 죽으면 해결책도 답도 없고 주변 사람들한테 상처만 줄 걸?"이라고 제 말에 제가 반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기록이라는 도구가 제 인생에 들어왔습니다.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여과 없이 쓰고, 해결책을 찾고,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는 시간을 20대부터 조금씩 가져왔습니다. 저를 많이 보듬는 시간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한 거죠. 혼자 아픈 밤을 견디며 만든 '나만의 비상 상자'에는 해열제, 소화제뿐만 아니라 노트와 펜도 항상 들어 있습니다.
상태별로 다른 기록 방법
기록을 한다고 해서 다 같은 방식은 아닙니다. 제 경험상 감정 상태에 따라 기록 방법을 달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일단 상태가 좋을 때는 소소한 질문들이 적혀 있는 메타인지 다이어리나 질문 스티커를 활용합니다. "오늘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은?" 같은 가벼운 질문에 답하면서 나에 대해 소소하게 알아가는 시간이죠. 이때는 독서도 라이트 하게, 딱 10분에서 30분 정도만 짧게 읽습니다.
상태가 약간 불안정할 때는 일기를 네다섯 장 빼곡히 적어 내려갑니다.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문제가 있으면 빨리 발견해서 해결하거나, 나의 상태를 인지하기 위해 객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에 두꺼운 도화지를 펼쳐서 병원 입원했을 때처럼 막 쓰고 비판하고 해결책을 찾는 작업을 합니다. "이거는 좀 아닌 것 같고, 얘는 괜찮은데, 해결책은 무엇이고" 이런 식으로 제삼자의 시선으로 제 글을 검토하는 과정이죠.
너무 바쁘고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질 때는 질문 노트를 씁니다. 시중에 파는 책들의 질문은 소소한 것들이지만, 제가 직접 만드는 질문 노트에는 저한테 딱 필요한 질문들을 씁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상황에서 나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질문들이요. 가끔은 ChatGPT에게 "지금 내 상태가 이런데 질문을 해줘"라고 요청해서 열 개 정도 추천받고, 그 답을 다 쓴 뒤 다시 ChatGPT에게 "분석해 줘"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저를 파고드는 작업을 계속하는 거죠.
그리고 상태가 정말 안 좋을 때마다 읽는 책이 있습니다.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은 영혼>인데, 사람의 중심을 지켜주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독서도 어떻게 보면 남이 한 기록을 제가 보는 거잖아요. 이것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자신의 상태를 써내리다 보면 안 좋은 상태에서 더 그 속으로 푹 빠져버리는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감정 해소도 중요하지만, 그 감정에 너무 매료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저도 중간에 이것 때문에 너무 쓰레기통처럼 써 가지고 해결 없이 계속 우울한 상태로 지낸 이력이 있거든요.
기록이 쌓이면 보이는 것들
기록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 이해와 성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정이나 머릿속의 생각이 형상화되면서, 왜 내가 이렇게 됐는지 무엇이 원인인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나 요즘 우울해"가 아니라, "아, 이번 달에 집 구조를 바꾸지 않고 청소를 안 했더니 기분이 나빠졌구나"처럼 구체적인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글로 남겼으니까 데이터가 쌓이고, 그 데이터를 보면서 내가 힘들거나 안 힘들 때 어떤 패턴이 있는지,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 힘들어지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지만 과거에 내가 극복했던 글들을 읽어 보면서 "아, 이때 이렇게 극복했구나. 그럼 지금도 잘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인드 세팅이 다시 됩니다. 자신감도 얻게 되고, "이때 이래서 힘들었는데 집 구조를 바꾸고 청소를 막 하니까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이러면 지금 바로 집 구조를 바꾸고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쌓인 데이터베이스를 싹 보다 보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함으로써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도와줍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목표를 설정하고 습관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집 청소하고 막 이렇게 살았다면, 요즘은 모닝 루틴이 있고 나이트 루틴이 있는 것도 다 기록을 통해 "이건 이렇게 해봐야겠다, 저건 저렇게 해봐야겠다" 하면서 습관이 조금씩 쌓인 결과입니다. 제 중간 밸런스를 맞출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한 거죠.
내가 왜 힘든지 종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고민이나 문제의 종점에는 어떤 키워드가 나옵니다. 일 때문이었다, 연인 때문이었다, 건강 때문이었다, 내 스스로의 마음 문제였다 같은 것들이요. 이 최종 키워드를 딱 가져와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하나하나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때문이라면 관계 회복과 소통 정리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커리어 때문이라면 잘 헤쳐나가기 위한 리스트를 만들어 실험해 보면서 한 발자국씩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죠.
기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핵심 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감정 정화 및 스트레스 해소: 막연한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 객관화
- 기억 강화와 삶의 흔적: 과거 극복 경험을 참고하여 현재 문제 해결
- 목표 설정과 습관 형성: 반복되는 문제의 패턴을 파악하여 환경 개선
- 자기 이해 증진: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명확히 하여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짐
사실 가장 좋은 점은 제 자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내 자신과 친해진다는 점입니다. 나를 많이 알아가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를 잘 알고 있고 나랑 친하니까 나는 이렇게 하면 금방 회복이 되니까 "어, 올 테면 와 봐라. 시도해 봐" 이런 효과도 있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실패와 실수에서도 굉장히 빠르게 회복할 수 있고요. 그 과정 속에서 굉장히 유연한 사람이 되더라고요.
우리는 외롭고 불안하고 너무 기쁘거나 너무 슬플 때 사람을 찾아가잖아요. 근데 사실 이 삶을 살아가면서 제일 나와 오래 함께 살아갈 사람은 나 자신이거든요. 저는 이 과정이 굉장히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종이와 펜 그것만 있다면 저는 어떤 일이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증명해 내거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많이 느끼고 자책하고 걱정하고 속상해하는 거 같습니다. 가끔 뭐 영상 조회수가 안 나오거나 오디션에 떨어지거나 인간관계가 망가지거나 누군가가 나를 험담하면 무너지기도 하는데, 그 안 좋은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많이 힘들거나 방향을 찾고 싶을 때는 가끔 나를 좀 놔주세요. 스스로가 "어쩌라고, 좆 까" 하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마음속에 잘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냥 살아갑시다. 이렇게 무너지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하고 망해봐야 성장하는 것 같거든요. 자책하지 마시고, 숨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잘하고 있으니까요.